1월의 어느날 밤, 꿈을 꾸었다. 꿈을 기록하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었다. 바로 1월 4일. 

요즘 칼 융의 자서전을 다시 읽고 있다. 

다시 읽고 있지만, 처음 읽는 듯한 이 느낌은 뭘까라고 생각을 해보았다. 

아마도 그 이전에는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고, 나머지 부분은 그냥 흘려보낸 듯 하다. 


이 책을 읽으며 예전의 꿈을 다시 들춰보았다. 

그 중 최근에 꾼 1월 4일날의 꿈을 꿈일기장을 통해서 다시 들여다본다.


#1. 원숭이

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시작된 건 지 알 수가 없다. 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. 

기억나는 건 철창 안에 갇혀있던 원숭이 한 마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애를 써본다. 

그러나 그 원숭이는 내 것이 아니기에 그 주인에게 적어도 철창 밖에서라도 생활할 수 있게 목줄이라도 달아달라고 부탁을 했다. 그 주인은 원숭이에 목줄을 달고, 원숭이는 옥상에서 끈이 묶인 채 이래 저리 돌아다녔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. 

원숭이가 좋아했는지, 그 주인은 나의 부탁을 받고 기분 나빠했는지 아님 그냥 그리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. 

분명한 건 주인 보다는 그 원숭이가 중요하다는 강렬한 인상은 받았다는 것이다. 

옥상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있다. 그 눈 한 주먹을 집어서 나의 입을 닦았다. 

(그 행동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, 마치 하얀 눈이 나의 입, 나의 말을 정화하려는 듯한 행동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.)

원숭이가 잡으려고 하던 것이 있다. 그러나 난 원숭이가 원하는 것을 맞춰야 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. 

그러던 중 우연히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니 야구게임을 하고 있다. 잠시 그 야구게임에 간섭을 한다. 

나의 간섭과 실수로 공을 정확히 맞추지 못했지만 그 상황이 오히려 홈런이 되는 상황을 맞이했다. 그 기쁨도 잠시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. 

테스트 할 것이 있다.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도 않고 관심도 주지 않는다. 가진 것도 없다. 그나마 00단체에 아는 사람이 있어 잠시 들른다.(현실에선 그 사무실에 찾아갈 이유가 도무지 없는데 말이다.)


#2. 어리지만 신성한 나무

그 사무실은 아까 내가 있던 옥상과 같은 곳인데, 외관만 00단체 사무실이다.

그래서 아까 있었던 원래 옥상이었던 그곳에서, 그리고 현재 있는 00단체 사무실에서 실험을 시작한다. 

화분에 몇 개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. 그 사무실에 있던 한 사람이 나를 돕는다. 

그 화분에는 이렇게 글이 쓰여있다. 

[토종나무-사철나무]

그 나무는 손바닥보다도 작다. 그러나 무성한 가지와 잎을 가진 무척이나 아름다운 나무다. 

쌍떡잎 식물이 아니라 큰 나무를 소형으로 만들어놓은 듯한 형상이다. 

그 나무를 잘라서 주기에 난 다시 그걸 화분에 정성스레 심는다.

옆에서 지켜보던 어떤 여인이 나와서 조언을 한다. 

많은 사람들이 식물을 키우는 이유는 자연친화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포장하는데, 그게 다 자기네가 먹을 식량을 키우는 것 아니냐, 이 나무를 이렇게 키워서는 안된다. 그렇게 자급자족, 식량으로 키워서는 안된다. 


이 나무를 키워서 성장과 치유, 신성함을 느껴야한다고 호소한다. 

그 꿈속에서 난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적어내려가며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다. 


그 여인은 이 말을 하면서 굉장히 화가 난 상태다. 어떻게 이런 취급을 할 수 있냐는 식이다. 

꿈속에서 화가 난 그 여인이 왜 화가 났을까하며 공감하지만, 그 화를 이해할 순 없었다. 

자급자족때문에 화가난 것일까? 식량 또는 먹는 게 왜 그리 화 낼 일인가? 인간은 굶어야 하나?

그렇다면 '신성함'이란 무엇인지, 치유란 무엇을 말하는 건지 궁금해졌다. 


그러나 묻지 않고, 아무렇지 않은 듯 그곳을 떠난다. 

다시 길을 나오는데, 유리벽과 창문에 큰 홍보지가 눈에 띈다. 

[영어+20,000원 = 카세트 테잎] 

그 문구를 보자 다시 그 사무실로 올라간다. 아까 옥상이었던 그곳 서고에서 책을 찾는다. 

내가 읽고 싶은 책의 시리즈가 보인다. 

그러나 그 책의 시리즈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. 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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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 칼 융의 자서전을 읽으며 이 꿈을 다시 펼쳐든 순간, 아! 하고 뭔가가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. 


그 식물을 바로 나 자신을 뜻하는 것이고, 내가 나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. 

즉, 당장의 필요한 것들로 나 자신을 채우려하지만, 그건 나 자신의 자아를 죽이는 것이라고. 

자급자족이란 표현은 어쩌면 현실에서 필요로하는 부분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고, 

정작 나의 자아가 원하는 성장과 치유, 신성함이라는 것 찾아가는 것에 대한 목마름을 방치한 것이라는 느낌이었다. 


3개월이 지난 지금, 

나도 모르는 사이 자아의 발견과 성장 무엇보다도 나의 자아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. 

나도 모르는 사이, 나의 자아가 알려준 대로 그 길에 있는 듯 하다.  

잠시 공허함과 방황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, 이 꿈이 다시 나의 가야할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. 

고맙다. 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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